나노하 FF-2. 마왕이 깨어날 때(5)

 

“건방지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야,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말이지.”


하야테가 피곤한 얼굴로 혼잣말을 하는 것을 시그넘은 그저 반사적으로 응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오토.”


하야테가 턱짓으로 허공에 떠올라 있던 넘버즈들의 프로필 중 한 구석을 가리키면서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조건을 내걸더군.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조건을.”


“조건이라 하심은?”


“스칼리엣티를 비롯한 특별 수감되어 있는 넘버즈들을 해방시킬 것.”


“…그 조건을 받아들이셨단 말입니까?”


시그넘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스칼리엣티를 비롯한 특별 수감 된 넘버즈들은 극히 위험하다. 그들을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거쳐야 하는 허가가 몇 개나 되는데 아무리 하야테의 권력이 강력하다고 해도 임의로 중범죄자를 방면하는 것은 절대로 무리다. 그리고 하야테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말로는. 말로는 뭘 못하겠어. 필요하다면 각서건 뭐건 다 써주겠다고 해서 일단 협력은 얻어냈지. 뭐, 오토 본인도 전혀 믿는 눈치는 아니었어. 그냥 나중에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적당히 내세울 대의명분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걸.”


“준장, 준장의 경우에는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시그넘의 지적은 타당했다. 지상 본부에서는 이미 실질적 지배자나 다름없는 하야테라고 해도 분명히 소속상은 시공관리국 본부 휘하의 여러 장군들 중 하나에 불과했고 그런 인물이 경솔하게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이 공개적으로 밝혀진다면 의회에서 가만 있을 리가 없다. 가뜩이나 지금 하야테의 위치는 미묘했다.


의회와 군 상층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 크로노와 대립하는 입장인 데다가 일단은 가장 친한 친구 사이였던 타카마치 대위가 반란을 일으켰다. 사실 일반적인 군인이었다면 진작에 감금당했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야테의 권력이 워낙에 막강하고 지상 본부의 군권을 모조리 다 장악하고 있기에 크로노도 별 말을 하지 않고 서둘러 오기만 하는 것이다.


“글쎄, 몇몇 사람이 듣긴 했지만 별로 상관없어. 오토 본인만 사라진다면 아무런 문제없으니까.”


“그 말씀은…?”


“타카마치 대위의 반란이 진압될 즈음해서 처리해야지. 시그넘, 맡기겠어.”


“…예.”


시그넘이 내키지 않는 어조로 수긍했다. 그녀 본인의 말마따나 그녀는 고지식한 기사였다. 하야테가 이런 비열한 수법을 쓰는 것을 전혀 납득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지식한 만큼 그녀는 명령이라는 수단에 대해서는 약했다.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시그넘이라면 오토를 잘 처리해 줄 것이다. 하야테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자 했다.


하지만….


[닥터를 비롯해서 따로 감금되어 있는 언니들을 풀어줘. 그래주겠다면 협력하겠어.]


하야테를 빤히 바라보던 오토가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날카로운 눈동자로 하야테를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그 오토의 눈동자만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 눈, 전혀 상대방을 믿지 않으며, 경멸하면서 상대방의 초라한 처지를 동정하는 것 같기도 한 그 불쾌한 눈. 그 눈동자가 무슨 접착제라도 되는 모양으로 끈적끈적하게 뇌 속을 헤집었다.


지직.


하야테는 애써 불쾌함을 지우기 위해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지만 불쾌감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빌어먹을 계집, 다음에 만나면 눈을 뽑아버리고 말겠어.”


“준장님?”


“아무것도 아냐. 그러고 보니 잊을 뻔 한 것들이 있군. 나카지마 상사를 불러줘.”


“나카지마 상사라면….”


“긴가 말이야. 아마 그녀라면 지금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겠지. 스바루는 반란에 참가한 게 확실하지?”


“네, 5시간 30분 전에 구조대원 숙소에서 이탈한 것으로 확인. 그 후 행적은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정보부의 분석에 따르면 아마 반란에 참가했을 것이라고.”


“지난번 스칼리엣티 사건 때 통째로 부서져 버렸으면 편했을 것을. 구세대의 되다만 폐품  주제에 정말 신경 거슬리게 하는군.”


하야테가 무자비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시그넘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하야테를 흘끗 바라보았다. 하야테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것은 분노와 짜증, 그리고 약간의 알 수 없는 무엇인가였다. 그리고 시그넘은 알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야테 역시 변해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아까부터 느껴지던 가슴 속의 공허감이 더더욱 커진 것을 발견했다. 샤멀과 비타가 사라졌다고 들었을 때 그녀는 불안을 느꼈다. 나노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이 진작에 죽지 않은 것을 한탄하는 하야테를 보면서, 그녀는 급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옆을 돌아보지 않고 힘껏 달린 후, 옆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런 감각 같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 길을 달리는 것을 위해 쏟아 부었기에, 그 이외에는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노인의 느낌. 약간의 후회와, 무기력감과, 그리고 이제는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런 거대한 체념.


그리고 그렇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무도 옆에 남아있지 않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달려온 길을 헛되이 하지 않기에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카지마 상사는 무슨 일로…?”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객관적 전력으로 봤을 때 노베랑 웬디가 스바루를 막아낼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아. 애초에 웬디는 스바루랑의 상성도 별로 안 좋고. 그럴 때를 위한 백업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그녀가 명령을 들을까요?”


“들어.”


하야테가 단언했다.


“그럴 여자야, 나카지마 긴가는. 적어도 스바루처럼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의심할 필요는 없는 정상적인 군인이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스칼리엣티 박사를 비롯해서 수감된 넘버즈들의 행방을 파악해두도록. 언제라도 꺼내서 써먹을 수 있도록 준비도 해서 말이지.”


“준장!!”


시그넘이 평정을 깨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급박하다고는 해도 독단으로 스칼리엣티 박사와 접촉을 하려고 하다니. 이건 뭐라고 변명을 해도 명백한 이적행위였다. 그것도 최악의 상대와의.


“준장, 아무리 그래도 그 명령은 철회해 주십시오!! 그건 이적행위일뿐더러 너무나 위험합니다!! 준장께서는 대체 뒷감당을 어쩌시려고….”


“뒷감당 따위 생각할 시간 없어. 우리의 적은 나노하고, 우리의 현재 최우선 임무는 그녀의 제압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쓸 수 있는 건 모두 다 써야 돼. 시그넘, 명령대로 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시그넘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도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불리한지는 알고 있었다. 나노하 혼자만 해도 막아내기가 벅찬데 거기에 넘버즈와 스바루를 비롯한 기동 6과 출신들의 인물들도 몇 가세했다. 게다가 나노하가 이끄는 항공 마도사대의 전투력은 완전히 불명이다. 하지만 나노하가 반란을 일으킬 정도라면 적어도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칼리엣티와 접촉을 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은 절대로 나올 수 없다.


그자는 미쳤다.


그리고 미쳤을 뿐만 아니라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


어딜 보나 최악의 조합이었다. 마치 지금의 나노하와 같은.


“한 시간 반입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을 가정해 보더라도 크로노 제독의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지상 본부가 버티지 못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일 셈이십니까?!”


시그넘은 거의 절박한 마음으로 외쳤다. 하야테가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건 도를 넘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시그넘은 필사적으로 하야테를 설득하고자 말을 꺼냈으나 하야테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야테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깍지 낀 손에 턱을 괸 채 집무용 책상에 가만히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느다란 담배 연기가 일정한 리듬으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


“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느냐고 물었다, 시그넘 중위.”


“무슨….”

꽈악.


쾅!!!!


갑자기 뻗어 나온 하야테의 손이 시그넘의 넥타이를 붙잡더니 그대로 끌어당겨 시그넘의 얼굴을 책상에 처박았다.


“크윽!”


쾅!! 쾅!!! 쾅!!!


“쿨럭, 쿨럭!!”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연달아서 책상에 처박았기에 순식간에 코피가 터지고 책상 위가 피가 흩뿌려졌다. 시그넘은 코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서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공포나, 고통 때문이 아닌 경악과 당혹감으로 인해서 하야테의 손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쾅!!!


으직.


“윽!!”


광대뼈에 금이 가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맨 마지막 순간, 하야테가 넥타이를 잡은 손을 풀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얼굴 정면이 아닌 옆으로 내려찍은 것이다. 어찌나 강하게 내리눌렀는지 시그넘의 광대뼈 뿐만 아니라 책상에도 금이 가 있었다.


후우.


하야테가 내뱉은 담배연기가 하야테 본인을 향해 시선이 억지로 고정된 시그넘의 얼굴에 뿌려졌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더니. 오늘은 그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 같단 말이지.”


하야테가 음침하게 반쯤 뜬 눈동자로 피범벅이 된 채 신음하고 있는 시그넘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시그넘, 내가 기대를 하고 있던 대답은 ‘네, 알겠습니다’야. 그 이외의 대답은 필요하지 않아.”


“주…준장….”


“나노하의 반란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이젠 시그넘까지 날 귀찮게 하는거야? 정말로 실망스러워.”


쾅!!


시그넘의 핑크빛 머리채를 휘어잡고 있던 하야테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들었다가 책상에 들이박았다.


“크흑!!”


주르륵.


계속 흐르고 있던 코피가 책상을 타고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시그넘은 이유가 없으면 납득을 못 할 모양인데, 뭐 좋아.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니까 지금 듣는다고 해서 별로 다를 것도 없겠지.”


하야테가 이젠 거의 다 태운 담배를 왼손으로 들더니 여전히 오른손으로 억누르고 있던 시그넘의 하얀 목덜미에 그대로 비벼 껐다.


“크으윽!! 끄윽!!”


시그넘은 필사적으로 새어나오는 비명소리를 지우려 했으나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평상시라면 괜찮았겠지만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데다가 일방적인 폭력을 당해 저항력이 약해져 있는 상황에서는 아픔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치익.


고통스러워 하는 시그넘을,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야테는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시그넘에게 ‘이유’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

마왕이란 게 꼭 한 명이란 법은 없지요.

뭐, 그런 겁니다.

이제 전골 재료나 좀 사러 나갔다 와야~


덧글

  • 발렌타인 2008/02/09 17:50 # 답글

    애니에선 존재감 없던 하야테가...ㅎㄷㄷ
  • 친한척 2008/02/09 19:00 # 답글

    ㅎ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머임 이 고어물에 필적하는 막장 전개는 ㅠㅠㅠㅠㅠ
  • 카시니츠 2008/02/11 15:13 # 답글

    ........................하야테....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