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내 청춘 러브 코메디는 잘못됐다 8권-맹독의 늪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8 특별판 - 10점
와타리 와타루 지음, 박정원 옮김, 퐁칸 ⑧ 그림/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1.1권의 하치만과 8권의 하치만을 과연 '똑같은' 캐리터라고 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그는 변했다. 오로지 홀로 고독감을 견디며 살아오던 외톨이 전사에게는 자신이 있을 장소와 분명히 소중히 여기는 인연과 실패와 성공이 뒤섞인 경험이 뭉친 1년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변해버린 자신과 완고하게 변하지 않는 자신 사이에서 그는 점점 늪 아래로 가라앉는다. 질퍽한 맹독이 침전된 늪 아래로.

2. 작중에서 하루노는 하치만에게 '이성의 괴물'이라고 말한다. 이건 정확하진 않다. 하치만이 부정한다. 그러자 하루노는 좀 더 정확하고 직설적인 답변을 내어준다. '자의식의 괴물'이라고.

옳다.

여태까지 하치만은 나와 너와 우리 같은 봇치들의 동경의 대상임과 동시에 어느 순간에나 어느 때에나 흔들리지 않는 철벽의 논리와 궤변으로 자신을 무장해왔다. 단순한 말꼬리잡기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는 철저하게 이론과 이성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자신은 외톨이이며 그에 따라 흔들림없이 '외톨이'로서의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아왔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자기희생으로 보일 수도 있고 오지랖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숭고한 영웅적 행위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치만에게 있어서는 그건 어느 쪽도 아니었다.

세상은 '나'뿐이다.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어봤자 길가의 돌멩이와 아무런 차이도 없다. 외톨이의 세상 속에서 인간인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기에 하치만은 남들이 뭐라고 하건 남들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면 주워서 치운다.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남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세계엔 자신 밖에 없기에 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라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그는 행동하고 있었다.

이번 권도 그가 취햐는 행동은 다르지 않다. 똑같이 자신이 나서서 모든 걸 짊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메시아 콤플렉스와는 무관계 하다.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자신 뿐이고 그런 자신에게 요구된 것, 필요한 것이 있기에 그냥 그에 따를 뿐이다. 첨가물이 있다면 무수한 '희생'을 통하여 그 경지에 달했던 만큼 반대로 남에게 어떠한 희생을 요구하는 상황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그런 강박관념 정도일까.

3. 유키노도, 유이도, 하치만도 자신들이 잇시키의 까다로운 주문을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거절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작중에서는 거의 설명도 없다.

하지만 여태까지 이 시리즈를 보아 왔다면 그들이 왜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당연한 대전제로 삼고 행동하는지는 명확하다. 하치만은 그것이 '희생'과 관련된 것이라면 입으로 아무리 불평을 하고 무리라고 해도 어떻게든 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자신 뿐이며 자신이야말로 제일로 중요하고 자신만이 존재하는 그의 사고 방식 안에서는 다른인간의 희생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성립해서는 안 되는 금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유키노는 이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녀는 불합리를 증오한다. 잇시키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은 철저한 자아의 성 안에 웅크린 하치만과는 달리 훨씬 더 전향적이다. 그녀의 안에서는 잇시키는 불합리의 피해자이다. 물론 하치만의 방식에 대한 거부, 대립심, 일에 대한 책임감 등의 마음도 없지 않아 있지만 기본적으로 1권에서부터 이어져내려온 그녀의 마음가짐은 '불합리'에 대한 철저한 반항과 타도로 이어진다.

유이는 그러한 유키노와 하치만을 알기에, 그런 둘의 힘이 되어주고 싶고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둘을 소중히 여기며 동경하기에 자신이 나서서 절대로 이 의뢰를 포기하지도 내던지지도 않을 그 둘을 대신하여 자신이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 그 셋은 잇시키를 회장선거에서 낙선시킨다는 이 의뢰를 받아들인다는 지점에서는 동의하지만 그에 대한 자세에서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균열이, 그들을 점점 더 늪으로 빠뜨린다.

4. 하치만은 변했다. 1권의 하치만과는 달리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의 철벽의 이성은 절대로 그것을 납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유가 필요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타인의 마음'을 배려하고 그에 맞추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거기에 짜맞출만한 이유가. 이미 7권에서 금이 가고 흔들리던 그의 이성은 '가족'이라는 조금 치사하기까지 한 해결책에 의하여 무너진다. 하치만은 8권까지 온 이 시리즈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으로 타인과 상담을 하고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배려한다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모습을 갖추고 멋지게 의뢰를 완수한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물론 비열하긴 했지만) 의뢰를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고 봉사부도 지켜내었고 자신도 타인도 상처입지 않았다.

하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타인의 마음 같은 걸 그가 알 리가 없는 것이다.

자신과 닮았지만, 자신의 동경이지만 자신과는 다른 유키노시타 유키노의 마음이 '정말로 자신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점에서 이미 늪은 하치만을 다 삼킨 상태였던 것이다. 정말로 그녀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알 수 없었던 히키가야 하치만은 실패했다.

그는 자신이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위한 이유와 변명과 수단까지 다 준비했지만 결국 그는 이성적이지도 완벽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안다고 착각했을 뿐이었다.

5. 이것으로 봉사부는 끝장났다.
삼발이의 한 축이었던 유키노시타는 결정적으로 실망했다. 그녀 또한 자신이 상대방을 안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녀에게 있어서 이번 사건의 결과는 최악이나 다름 없었다. 여태까지 있어서의 경험과 하치만과의 만남으로 변했지만 결코 변하지 않은 유키노시타 유키노와 히키가야 하치만은 결정적으로 빗나가버렸다.

히키가야 하치만은 자신이 변하지 않았듯이 그녀 또한 처음의 그녀, 타인에게 차갑고 고고하며 하루노의 그림자에 가려서 허덕이는 그녀일거라고만 생각했지 그녀가 자신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관계를 창설하고 처음으로 하루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가 생겨났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히키가야 하치만 만의 잘못은 아니다.

유키노시타 유키노 또한 히키가야 하치만을 자신만의 지음(知音)으로 생각했기에, 세상에서 단 하나 자신을 이해해 줄 상대로 생각했기에 히키가야 하치만이 유키노시타 유키노에게 한 때 실망했던것처럼 자신만의 이상적인 히키가야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너라면 알 거다'라는 그러한 그녀의 기대는 귀엽고 안쓰럽고 냉혹한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실망했다.

특히나 변해버린 히키가야 하치만이 '겉 뿐인 관계'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짓밟아버렸다는 점에 있어서.

6. 작가 후기를 보면 아무래도 다음 권은 하루노와 유키노의 관계가 좀 더 조명될 것 같다.

이번 권의 경우 하야마와 하루노의 비중이 상당히 올라갔는데 이 두 캐릭터도 흥미롭다. 특히나 복잡한 캐릭터인 하루노의 경우 정말로 다양한 면을 보이는데 이번 권에서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유키노에 대한 질투, 혹은 분노의 면이다. 중간의 커피숍에서 하루노는 하야마에 의해 불려온 유키노를 보면서 '그렇게 떠넘기는 건 엄마랑 똑같네'라고 경멸하듯이 말한다.

확실히 하루노는 일종의 사기적인 캐릭터이며 히키가야 하치만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상대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하치만은 하루노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물론 '공포'라는 감정은 부정적이며 그러한 면에서는 확실히 하치만은 하루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지만 공포 자체에 증오를 느끼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그러한 차이를 인식하고 볼 경우 하루노의 행동 또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특히나 저 '떠넘기기' 발언으로 볼 경우 마치 유키노시타 유키노에게서 모든 것을 뺏어온 것처럼 보인 그녀 또한 유키노에게 빼앗겨 왔거나 혹은 유키노의 강제적인 방파제가 되어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완벽하게 그 기대에 부응해 왔지만 하루노의 내면에 대해서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그녀는 쾌락주의자처럼 보이지만 6권의 문화제에서 그녀는 히키가야 앞에서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듯이 완벽하게 입을 다물고 벽을 쌓기도 했다. 즉, 그녀의 가장 깊은 본질은 어떤 면에서는 하치만과 상당히 가까울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모두와 완벽하게 거리를 두면서도 친하게 지내고 하야마가 말하듯이 자신이 흥미를 가진 상대는 망가트릴 정도로 제멋대로 행동하지만 그것이 반대로 그녀의 심리적인 약점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하다.

물론 이는 다음 권이 나와봐야 알 일이지만 말이다.

하야마의 경우에는 새로운 일면보다는 계속 심화되어온 모습을 좀 더 다층적으로 보여주는 데 주력했는데 결론은 결국 그와 하치만은 이해할 수 없지만 동시에 결국 닮았다는 점이다. 하치만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왔다면 하야마는 반대로 모두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하치만이 '혼자'에 집착하는 것처럼 하야마는 '모두'의 시점에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즉, 대칭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7. 잇시키의 경우에는 사실 이대로 이야기에서 탈락해도 상관 없지만 작가의 성향상 이 캐릭터는 앞으로도 계속 조연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특히나 생각보다 살갑게 히키가야 하치만을 대한다는 점, 사가미의 업그레이드 버젼이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의 짝퉁이나 다운그레이드 버젼이기에 의외로 하치만과의 거리를 좁히기 편하다는 점, 이번 권에서 나쁘지 않은 관계를 성립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어쩌면 하가나이의 코다카 처럼 허울만 남은 봉사부에 지친 히키가야가 잇시키를 통하여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거나 하는 것도 가능성은 있어보인다. 게다가 미우라와의 문제도 남아있고 하니...다만 이건 내 개인적인 기대기에 그냥 다음 권부터는 지나가듯이 언급되고 땡일수도 있지만.

8. 시작부터 끝까지 질척하고 독기가 스멀스멀 퍼져나오는 권이었다. 게다가 한 번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한 번 다시 씹어야 할 여지가 충분하다. 게다가 자신의 살아온 환경과 여태까지 1권에서부터 8권까지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캐릭터들에 대해 자신만의 이미지를 쌓아온 이들이라면 정말로 이 권이 주는 이 쌉쌀한 느낌은 뭐라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매력적이다.

4권, 6권에서의 장대한 폭발력은 없지만 여태까지 모아온 모든 것의 엑기스를 짜내어서 농축시킨 이 8권만의 걸쭉한 매력은 정말로 입에 휘감기는 그런 맛이 일품이다. 시리즈물이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동시에 단권으로서의 완성도도 매우 높다. 그런 면에서 별 다섯 개.

9. 읽고 나서 탈력감이 옴과 동시에 다음 권이 매우 기대된다.

10. 개인적으로는 퐁칸의 그림은 6권이 절정이었고 7권부터는 어째 좀 마음에 안 든다. 특히 이번 권의 경우 전반적으로 두상이 위로 길어지면서 이마가 넓게 보이는 듯한 현상이 심화됨. 게다가 너무 투명한 느낌에 신경쓰다보니 펜선 같은 데에서 균형감이 좀 어긋난다. 6권의 그 느낌이 딱 좋았는데...

덧글

  • 아인베르츠 2014/02/17 23:37 # 답글

    이 작품은 뭐랄까.... 매권마다 손을 놓을수가 없지요. 인물 하나하나가 모에 요소뿐만이 아닌, 내면 묘사에도 상당히 충실한 편이고 사건 또한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도 있고, 공감이 가기 쉬운 것도 있기 떄문에 더더욱 그런 면도 있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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